임진왜란에 해당하는 글 1

역사저널 그날 175회를 보고 남기는 부연설명

취미|2018. 6. 4. 21:20

현충일이 있는 6월이 되니 역사저널 그날에서 또 임진왜란 특징으로 방송을 합니다. 공교롭게도 스케쥴이 잘 맞아서 5월 마지막 주에 선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6월 첫  주에 원균과 이순신의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제가 아는 내용이 있어서 개인적인 부연설명을 남겨봅니다. 가방 끈 짧은 백수의 글이니 웃고 넘기시면 좋겠습니다.

 

 

▲ 몇 년째 시청하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

 

1. 당시에 화포에 장착한 탄환은 철탄이었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포탄이 명중해서 배에 불이 붙는 특수효과가 과장된 설정이라는 것인데요. 이 말에 대해서 약간의 부연 설명을 보태겠습니다.

 

현대의 포탄은 외부는 철 재질, 내부는 화약으로 철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약에 의해 날아간 포탄이 목표물에 명중하면 탄의 앞 부분 기관이 터지면서 내부에서 화약이 폭발해서 외부의 철갑이 깨어지는 형태죠. 그 과정에서 화염이 일 수 있고 내부에 있던 철 조각이 튀면서 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화포는 그런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무쇠로 만든 포에 화약을 넣어 다지고 그 앞에 목편을 넣습니다. 그 다음에 철로 된 탄환이나 굵은 나무 화살을 넣습니다. 화약이 터지는 힘으로 나무로 만든 목편이 밀려나고 그 힘을 받아서 철이나 나무로 된 물체가 날아가는 형태입니다. 실제로 초창기에는 목편을 넣지 않아서 화포가 무기로서 효율이 낮아서 사용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목편을 넣게되면서 화포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기술로 지금과 같은 포탄을 만들 수 없었고 돌로 된 구슬이나 철로 된 구슬, 나무로 만든 굵은 화살을 날렸습니다. 그게 적의 배에 떨어지면 배를 부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재래식 화포가 임진왜란에서 큰 활약을 했던 이유는 이순신 장군의 전투 스타일의 힘도 있지만 왜군의 적선이 홑겹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즉 한번 구멍이 뚤리면 침몰할 수 밖에 없었던거죠.

 

2. 당시 화포의 사거리는 50 ~ 100미터 였다.

 

이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총이나 대포는 유효 살상 거리와는 비교가 안 되게 짧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무쇠로 만든 화포에 꼭 맞는 목편을 제작할 수 없었습니다. 또 탄환과 포열(포의 몸체)도 연결되지 않았죠. 즉 포열과 목편, 탄환 사이에 미세하나마 공간이 생깁니다. 이는 화약의 폭발력이 100%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현재와 다르게 당시에는 포열 내부에 강선이 없고 탄환에도 강선과 연결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즉 밀어내는 힘에 의해서만 목표를 향해서 날아가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 현재의 총이나 대포의 포신이나 총열 내부에는 나선형의 강선이 있습니다. 또한 탄환에는 끝 부분에 홈이 파여있죠. 가장 중요한건 탄환을 뒤에서 장전한다는 것입니다. 탄의 가장 큰 부분을 마지막에 밀어넣는 형태죠. 이 형태에서 탄환의 홈은 강선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강력한 화약의 힘으로 탄을 밀어내면 탄은 강선을 따라서 회전하며 앞으로 날아갑니다. 탄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가기 때문에 더 멀리 있는 적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에는 단순히 탄이 날아가는 사거리는 길어도 정확히 목표물을 맞출 수 있는 사거리는 기껏해야 100미터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보다 멀어지면 쏠 때마다 생기는 변수로 인해서 적을 맞출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없었을것입니다.

 

3. 당파(충파)가 아예 없었다.

 

전 이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시 왜선은 삼나무로 만든 배의 바닥이 v 자 형태인 쾌선입니다. 오로지 전진, 이동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함선이죠. 이에 반해서 조선의 군함은 소나무로 만든 배의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습니다. 속도보다 회전과 내구성에 초점을 둔 함선입니다. 특별한 점은 왜선과 다르게 배의 아랫부분이 겹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겉에 외관이 뚫려도 속에 벽이 하나가 더 있는 형태입니다.

 

이 상황에서 당파(충파)를 주력 전술로 쓰지는 않았더라도 화포를 이용한 격전 이후에 백병전에 돌입할 때 사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의 삼나무는 조선의 삼나무보다 목질이 약합니다. 덥고 습한 기후에서 빠르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조선의 군함은 소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목질의 차이가 상상외로 컸습니다. (현재 가구를 제작할 때도 삼나무는 서랍의 속재로 쓸 뿐 가급적 가구 자체로 제작되는 일은 드물죠. 소나무는 저급이기는 하지만 식탁이나 책상, 침대의 프레임 등으로 제작이 됩니다.) 속도전에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군이 당파(충파)를 사용하지 않았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조선과 왜의 함선 내구성에 대한 이야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시에 수군의 역할은 인력 수송이 목적이었습니다. 배에 많은 수의 전투인력과 식량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것이 수군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화포는 장착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더 많은 물과 식량을 실어야되니까요. 하지만 조선의 수군은 함선에 화포를 설치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 함선에는 화포가 없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조선군에게 당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거듭되자 일본군도 함선의 앞 머리에 화포를 2개 장착합니다. 조선군처럼 양 옆에 많은 수의 화포를 설치하고 싶었으나 폭이 좁고 내구성이 약해서 양쪽에서 포를 쏘게되면 배가 부서져버렸기에 궁여지책으로 앞머리에만 2문의 화포를 설치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판옥선이 당파(충파)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전략, 전술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잖아요.

 

4. 명량 해전에 대한 이야기 (13 vs 330)

 

이는 기존 방송분에 대해서 부연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진도 앞바다 해협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은 마주합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해전 기록을 보면 우리가 정한 장소에서 정한 시각에 싸움이 시작되는걸 볼 수 있습니다. 명량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닷물이 조선군을 향해서 들어올 때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조선군은 명량 해협이 아니면 전투를 할 장소가 없습니다. 즉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나 저러나 격군은 많이 힘든 전투였죠.) 그런 의미에서 밀물때 전투가 시작됐다는건 일본군이 불편하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전투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선군은 13척이 일자진을 펼친 상태로 일본군을 향해서 화포를 발사합니다. 그럼 돌격하던 왜선 중 몇 척은 반파되어 산산조각이 나겠죠. 그 잔해들이 밀물을 타고 좁은 해협으로 들어옵니다. 물살이 쎈 해협에 끌려들어오는 파손된 왜선들은 그 상태로 천연 방어막이 됩니다. (만약 썰물이었다면 좁은 지역에 있던 잔해가 넓은 지역으로 빨려가면서 흩어졌을겁니다.) 가뜩이나 좁은 명량해협에 있는 조선군을 향해서 일본군이 진격할 수 있는 통로는 더 좁아지게 됩니다. 일본군은 이미 해협 입구에 들어섰기 때문에 빠른 물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빠른 물살을 타고 접근전을 시도하는데 용이한 왜선의 특성이 완벽하게 발목을 잡게 됩니다. (선체를 회전시키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직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뒤로 빠지고자 속도를 늦추면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더 좋은 먹잇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투 상황으로 33 척 정도가 실제 전투에 가담을 했고 나머지 300척은 밖에서 지켜봤습니다. 그 상황에서 밀물이 썰물로 바뀌면서 조선군이 전진하는데 유리한 물살로 바뀝니다. 이 때 후방에 있던 300척은 후퇴를 했고 33척은 거의 완파되어 이순신의 수군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게 명량해전의 모습입니다. (만약 전진하는 조선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전투를 벌였다면 일본군이 이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눈 앞에서 싸우지도 못하고 산산조각난 아군을 보면서 그 누가 싸우고 싶었을까요? 일본군이 후퇴한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은 철저히 기다리고 물 때를 맞춰서 적이 들어오게 만들었습니다. 그건 그가 기다려야 할 때 끝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입니다. 만약 이순신이 감정에 휘둘려서 들고 날 때를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면 똑같은 상황이었어도 일본군이 뛰어들어 공격을 하지는 않았을겁니다.

 

* 그리고 이순신의 수군이 했던 가장 큰 역할은 일본군을 괴멸시킨게 아닙니다.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여 조선의 수도 한양에 집결하려는 그들의 전략을 막았다는데 있습니다. 전라도 해안을 따라서 한양으로 진격하던 일본 수군의 발을 완벽하게 묶었으니까요. 덕분에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사수했고 이는 일본군의 식량 수급 문제와 전략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애초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밀고 올라갈 예정이었고 전라도를 함락시켜서 군의 식량을 확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전략을 고수했기 때문에 공격적인 모습보다 방어적인 모습으로 한양으로 오르는 길목만 틀어쥐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게 이순신이 위대한 이유입니다.)

 

그냥 역사저널 그날 175회를 보고 좀 더 설명을 붙이고 싶어서 이 시간에 블로그에 글을 남겨봅니다. 위에 사실은 팩트가 아닙니다. 다만 영화 몇 편과 이슈가 되었을 때 유명한 강사의 강의 몇 번, 대학생때 들었던 교양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제가 임진왜란에 대해서 가진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제가 군대에서 배운것도 포함됩니다. 한마디로 증거 없는 헛소리입니다. 그냥 재미있게 읽으시면 되는 내용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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