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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 박범신 장편소설 읽은 후 느낌

일상|2018. 2. 11. 10:51

은교 - 박범신 장편소설

 

 

긴 시간을 잡고있던 책 '은교'

 

 책장에서 이 소설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게 언제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제서야 은교를 다 읽었다. 매일 의무적으로 책을 집어들지 않아서 생긴 일. 하지만 확실한건 한번 펼칠때마다 꽤 오랫동안 책을 붙잡고 있어야했다.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은교는 어떤 아이일까?' 라는 궁금증.

 

30대의 내가 20대 초반의 지인을 만났을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내가 들었던 20대 초반의 사랑과는 다른 그가 겪고있는 20대 초반의 사랑이야기다. 내가 아는것보다 가볍고, 개방적인 시선들을 접했었다.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은교에게 '사랑'은 '놀이'였을거라는 생각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릴때는 무용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를 써요'라는 은교의 말을 읽고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그 긴 시간의 끝에서 박범신 작가가 은교를 통해 보여준 젊은이의 '사랑'은 좀 더 특별했다. 그것이 이적요가 바라본 은교의 모습이었을까? 또 궁금해진다. 어쩌면 내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확정적으로 이 글에서 적는건 이 글을 읽게될 모든 20대 젊은이에게 모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틀렸음을 알았으나 그 느낌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 부실한 경험이야말로 서지우의 그것과 다를게 무엇일까?

 

 

후기라던가 독후감이 될 수 없는 글의 서문

 

'미치겠다'

 

 이 책을 읽고 첫 짝사랑을 강제로 끝낸 뒤 적었던 시나리오를 찾아 외장하드 몇 개를 뒤적였다. 내 인생에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감정은 사치라는 생각으로 점철된 10대를 뒤엎고 말았던 20대 중반의 짝사랑에 대한 너무나 사실적이기만했던 바보같던 그 글. 없다. 30대 초반 어느날 모든것이 무의미했던 그 때 십년을 갖고 있던 습작노트를 찢어발기면서 함께 없앴던가? 지금의 내 감정에서 '은교'에 대한 진짜 후기는 사실만을 순서대로 나열한 그 못난 시나리오를 8년이 지나 조금은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소설로 각색하는 것으로만 쓰여질 수 있겠다 싶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은 후기나 독후감이 아닌 그냥 잡담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폭력성

 

 어린시절에 입에 달고 살던 '사랑'이라는 단어는 남녀간의 그것이었다. 육체적 행위를 배제한 감정적인 환상. 30대 중반의 내가 보게되는 사랑은 그 모습이 너무 많다. 집착일수도 있고 살인충동을 유발하는 질투일수도 있다. 때로는 연민으로 모습을 바꾼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의무, 책임, 신뢰, 우정, 믿음 등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포괄적으로 담고있는 단어가 바로 사랑이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지우와 이적요, 그리고 은교. 이 세 사람이 보여주는 모든 감정이 '사랑'이다. 난 이런 모습을 갖고있는 사랑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모습이 많은만큼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서로 다른 온도차를 지닐테니까. 그건 두 사람의 온도차가 같지 않는 한 어느 한쪽에는 반드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표지의 삽화가 너무 야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 문득 본 표지의 삽화는 너무 선정적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그러한지 설명하는 내용의 글을 적을 능력이 안되는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다만 이 글에서 표지의 삽화에 대한 '야하다'는 생각은 꼭 적고 싶었다. 저 그림이 무엇이 야하냐고 빈정거릴 수 있지만 그러지 말자. 내 감정의 온도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갖고있는 감정의 온도가 다르기에 오는 차이일뿐이다. 옳고 그름이 무색한 논쟁이 될 뿐이지.

 

은교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였다.

 

 책을 읽고 쓰는 글에 관련된 내용이 하나는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적어본다. 서지우와 이적요의 관계는 부정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멋에 길들여진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얽매여서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했던 두 사람. 서로 다른 모습의 사랑을 간직한채 서로를 대면대면 넘겨버렸던 관계. 만약 은교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끝까지 그런 가식적인 관계로만 남겨졌을테지.

 

 사람은 누구나 가식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살아간다. 그 포장이 뜯겨져나가는 순간이 바로 사랑에 '미쳤을때'다. 제정신이 아닐때에서야 비로서 사람은 판도라의 상자를 잠그고 있는 열쇠를 부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소설의 결말과 다를 수 없다. 포장하지 않은 인간은 타인이 욕할만큼 추악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않기 때문이다.

 

 

책 속의 시

이 책 속에는 상황 속 이적요의 마음을 비춰주는 여러개의 시가 등장한다. 그 중 공감되는 것을 하나 옮겨본다.

 

p. 369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은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세상을 보고 짖는 것은 무섭기 때문인데

그대는 오늘도 개보다 많이 짖는다.

 

책 속의 문장들

 소설 '은교' 속에는 멋들어진 문장들이 꽤 나온다. 그리고 나 같은 필부는 한 줄로 끝낼 감정을 붓을 쥐고 그림을 그려내듯 쏟아낸다. 책을 다 읽기 전의 난 그 문장들을 옮겨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말미에 나온 이적요의 고백처럼 그따위 '거짓말'을 굳이 옮겨놓을 이유는 없다. 다만 단 두 문장은 지금도 내게 일렁임을 준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어이없을 문장이지만 적어본다. 이것이 내게는 '진실'이니까.

 

p. 354

 

"하고싶으시면요, 키스...... 하셔도 돼요......"

 

폭풍같은 울림이었다.

 

책 속, 이적요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다.

 

 책의 말미에는 자신의 집에서 서지우와 은교가 관계를 맺는것을 목격한 이적요의 시선이 적혀있다. 그 글을 자세히보면 그가 했던 사랑을 알 수 있다. 내가 좋아하던 그녀는 그놈에게 당하는 것이어야했고, 그녀가 지르던 교성은 즐거움이 아니라 아픔으로 인해서 내는 비명이어야했으며 그녀의 꽃잎은 자신이 목격한 그 순간에 터져나와 붉게 물들어야했다. 아무리 이성적인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감성적이 되고마는 그 논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인이라서 고상한 문구들로 표현한것 뿐, 여느 필부의 감정도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자신의 기억속에 벌거벗은 사람 숫자 만큼이나 그녀의 기억속에도 그만큼의 사람이 있을텐데 사랑을 하게되면 지적능력이 떨어지는지 그걸 부정하고 싶어하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억지를 부리지 않는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마치면서...

 

 영화를 끝까지 봤고, 소설을 중간까지 봤을때까지만해도 난 가식을 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지우와 이적요의 그것은 부정에 가까운 질투였음을 허세를 잔뜩 묻혀 적어내고, 은교를 통해서 비춰지는 이적요의 그것을 존중받아야 할 본능으로 포장할 생각이었지. '젊음'이라는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세속의 폭력을 비웃으며 사랑의 가치를 떠받들며 이 책을 숭고한 이야기로 포장하려했다. 책 속에 그럴듯한 문장들을 끄집어내서 마치 내가 평론가나 되는것마냥 멋을 부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p. 354의 저 문장을 읽고 그 뒤에 은교의 고백들을 들으면서 그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적요의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 멋들어질 것 같고, 서지우가 은교를 대하는 그것과 빗대며 그 숭고함을 붙여주는게 있어보이는것 같을 뿐이었다. 결혼이라는 미명아래 탐닉하고 즐기는 우리의 삶이 늙은이의 욕망과 젊은이의 욕망으로 나눠서 비춰지면서 난 또다시 가식을 떨 준비를 하고 있었던게다. 은교의 저 한 마디의 말은 우리가 그래야 한다며 못 박았던 관계의 틀을 완전히 깨는 발언이었다.

 

'뭔가 크게 착각한것 같다.'

 

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은교의 입장에 대한 나만의 상상력을 펼칠 생각을 접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옳다. 그르다의 잣대로 표현하려던 마음도 접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온 글의 내용은 위와같이 허술하고 볼품없다.

 

이 글을 마치면서 난 한 가지 욕망을 가져본다. 은교를 만나보고 싶다. 묻고 싶다. 외로웠냐고, 불쌍했냐고, 즐거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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