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립군 본 후기

취미|2018. 1. 24. 20:26

1592년의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최초로 서자의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선조. 자격지심만 없었다면 성군이 될 재목이었으나 서자라는 약점과 왜란의 발발로 인해서 못난 모습으로 기억되는 조선의 왕이 다스리던 나라. 건국 이후로 큰 전쟁이 없어 군기는 문란했고, 위기의식 없이 기득권층의 태평성대만 이어지던 그 때. 세종대왕 이후로 이렇다 할 계기가 없이 명맥을 이어오던 그저 그런 국가. 실제로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지요. (저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이미 1592년에 망했다고 봐요.)

 

백성들은 곡기를 채울 길이 없어 남의 초상집에서 곡을 해주고 밥벌이를 하며, 남의 군역을 대신 서는 대립군이 직업이 되어 식솔을 챙기던 방탕한 시기. (스스로 만들지 않았는데 찾아온 평화는 자연스럽게 빈부의 격차를 늘리고 수탈과 부정을 낳지요.) 그 시절의 대립군 수장 토우를 통해서 나약한 왕세자 광해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바로 '대립군' 이에요.

 


 

이 영화에서는 광해군은 보이지 않아요. 철저하게 가려지죠. 오히려 수 많은 위기와 습격의 원인을 제공하는 도구에 불과해요. 이야기 상으로는 충분한 비중과 주연에 버금가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려내는 과정에서 흐릿하게 묻혀버려요. 아버지인 선조가 자신이 성공적으로 분조를 이끄는 것을 시기하여 끊임없이 자객단을 보내는 사실을 알게된 광해를 그리는 모습조차도 대충 묻혀버려서 안타까웠네요.

 

나약한 광해

 

이 작품에서 광해군은 시종일관 나약한 철부지 어린아이로서 모습을 보여줘요. 궁녀인 덕이가 '불쌍하다', '안쓰럽다'며 챙기는 모습을 보여줄때마다 여진구가 아니라 더 어린 아역이 들어갔어야 하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네요. 아버지의 진심을 확인하고, 충신의 몸을 방패삼아 목숨을 지켰고, 덕이가 죽어나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조선의 왕세자. 맨 마지막 장면의 광해 모습을 얻기 위해서 결국 그의 사람과 대립군 전원이 희생되어야 했던 성장 드라마. 그게 바로 이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정재, 김무열, 박원상을 비롯한 명품 배우들. 정말 남자가 나이를 먹을려면 저렇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해요. 한 동안 별다른 이미지 없이 모래시계만 떠오르던 이정재는 믿고 보는 캐릭터를 가진 남자 배우가 됐고, 저보다 어린 김무열은 닮고 싶은 멋진 남자 배우가 됐네요. 대체 저 사람이 조금 있으면 50이 맞나요? 부럽네요. 저도 저렇게 나이를 먹고 싶네요. 언제부터였더라? 신세계, 관상, 대립군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티켓파워 팍팍 풍기는 명품 배우가 되셨어요.

 

 

이솜. 큰 비중이었던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궁녀. 나약한 광해를 옆에서 누이처럼 보살피며 챙겨주던 궁녀에요. 중간에 세자인 광해를 마음에 품은 모습이 언뜻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인간 광해에 대한 연민이 더 강하게 비췄던 캐릭터. (마음에 품은걸 알게된 건 선조의 시기심을 설명하면서 공빈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궁녀 출신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덕이 표정이 살짝 바뀌더군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정재와 둘이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던 덕이 모습. 광해 옆에서는 보호자인데, 토우 옆에서는 마냥 귀여운 꼬마 아가씨. 꽤 인상적인 캐릭터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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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평을 보니까 역사에 관심이 많고 잘 알면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내용을 봤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재미를 느끼라고 만든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드라마에 가까운 내용이에요. 역경을 딛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감동을 선사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담담하게 전쟁 속에서 왕세자로서의 광해가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낸 드라마. 그래서 재밌다.는 평은 좀 안 맞는것 같아요.

굳이 제가 평을 달자면... 못 생긴 얼굴은 아닌데 그렇게 예쁘지도 않지만 매력있는 사람. 반하면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보이지만 관심 없으면 그럭저럭 봐줄만한 상대. 영화 대립군은 그런 작품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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